복지관에서 온 전화
박비봉
올해 초, AI 협업 제안서를 주변에 돌렸다. 지인 위주로, 소수에게만. 제조업, 유통, 제약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아는 사람들에게만 보냈으니 아는 범위 안에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통은 예상 밖이었다. A복지관이었다. 복지관 실무자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제안서를 봤다고 했다. 누군가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제안서는 내가 보낸 곳보다 멀리 가 있었다.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 사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랬다. 복지관은 운영 시스템 도입을 고민하다 수천만 원대 견적을 받았다. 복지관 예산에서 그 돈은 무겁다. 그래서 담당자가 결심했다. AI를 써서 직접 만들기로.
그리고 실제로 만들었다. 몇 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개발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AI와 함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실무에 쓴다는 것. 나는 이 시도 자체가 지금 시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만드는 일의 문턱은 정말로 낮아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쓰다 보면 예외 상황이 나오고, 한 곳을 고치면 다른 곳이 흔들렸다. 담당자는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이다. 시스템을 계속 돌아가게 하는 일에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연락한 것이다.
만드는 일과 계속 돌아가게 하는 일은 다른 일이다. 15년 동안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이다. AI는 만드는 문턱을 낮췄지만, 운영의 무게는 아직 그대로다.
버그 수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처음 요청은 버그 개선이었다. 코드를 열어보고 고민이 시작됐다. 덧대서 고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덧댈수록 다음 수리가 어려워지는 구조였다. 이 복지관은 이 시스템을 앞으로 몇 년은 쓸 것이다. 그렇다면 기초부터 다시 만드는 게 맞았다.
다시 만들면서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복지관에 필요한 것들이 우리가 대학에서 15년간 다듬어온 것들과 구조가 같았다. 출석은 근태였고, 강의는 프로그램이었고, 학생식당은 구내식당이었다. 건물 출입은 그대로 건물 출입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이다.
지금 그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있다. 담당자는 만족하며 쓰고 있고, 우리는 대학 밖에서 이 구조가 통하는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무료로 제공하는 이유
우리는 이 시스템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기부가 아니다.
소프트웨어의 역사에서 돈을 내는 사람은 계속 바뀌어왔다. 소프트웨어를 사던 시대에서 구독하는 시대로 왔고, 검색과 지도는 쓰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돈이 나온다.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이 언제까지 기본값일까. 나는 이 질문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미래 수익 모델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로 삼기로 했다. 복지관은 원하는 시스템을 얻는다. 우리는 복지관이 직접 돈을 내지 않아도 수익이 생기는 구조를 찾는다. 어떤 구조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모르니까 실험이다.
영업하지 않았는데 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영업한 적이 없다. 그런데 A복지관의 소개로 쓰는 곳이 늘었다. 지난주 회의를 거쳐 다섯 곳이 되었고, 요즘은 거의 매주 어딘가에서 연락이 온다.
영업이 만든 성장이 아니라 만족이 만든 성장이다. 이런 성장은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방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쓰는 사람이 옆 사람에게 권한다는 것보다 확실한 신호는 없다.
아직 모르는 것
수익 모델의 답은 아직 없다. 다섯 곳이 쉰 곳이 되었을 때도 무료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때의 운영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지, 어느 지점에서 어떤 수익이 생길지. 전부 열려 있는 질문이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단톡방을 타고 온 전화 한 통이, 우리가 대학에서 다듬은 원형을 다른 공간에 다시 조립하는 첫 실험이 되었다.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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